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내 삶은 의문의 연속이다.
중학교 시절, 내 화두는 늘 데카르트 명제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궁핍하고 무기력한 삶, 가까운 사람의 폭언과 무관심, 가스라이팅은 나와 철학을 가까이 하도록 만들었다.
아니면 철학은 내게 그냥 선민의식이었다거나,
현학적으로 보이기위한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왜 태어나는가?
현상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의 부모가 번식을 위한 교미를 하고 출산을 결정해서이다. 인과적 결과다.
어쩌면 피임기구의 부재라는 가벼운 이유였을 수도 있다.
둘 사이의 눈부신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한 순간의 실수로 어쩔수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 존재의 이유에 그럴싸하거나 위대한 이유를 찾는건 내 생각에 큰 의미가 없다.
어디로 향하는가?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서 나아간다. 서서히 노화가 진행되면서 신체와 정신은 전보다 눈에 띄게 쇠약해진다.
사람들은 사고를 당할수도, 백신을 맞고 위독해질 수도, 자해를 할수도 있다.
스스로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 권한인 '자결권'만이 자유로운 죽음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사람들의 두려움은 다양한 원인에서 찾아온다.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기인한 공포부터, 당장 내일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불안, 연인에게서 이별을 통보당할 까 겁먹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대신 공포는 고통과 같이 하는 맥락이 있다고 본다.
공포가 없는 느낌은 가슴뛰는 일이 없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찾아오는 미지의 공포와
일이 잘못될지 모른다는 변수가 없다면
기계적인 삶이 이어지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어릴 적 곱씹었던 이 화두는 내게 미지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나는 매 순간 무수히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흩어지는 와중에 다른 생각은 계속해서 떠오른다.
이런 필름이나 영화 프레임의 연속성처럼 연결되는 생각과 기억은 삶을 유지시킨다.
삶이 싫을 때 조차 억지로 먹이는 야채처럼 꾸역꾸역.
어린 내게 죽음을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이런 내 생각이 끝난다는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이가 제법 든 지금은 죽음과 잠을 동일시 하려는 습관이 있다.
잠들면 사람의 체온은 떨어지고 가짜로 죽은 듯한 상태를 만들어 에너지를 보존시킨다.
몇년 전 죽을 듯한 공포를 느낀 정신착란을 경험한 적이 있다.
심한 피해망상에 빠져들어 모든 세상이 나를 공격한다 느끼면서 거울속 내 얼굴조차 경계하다가 패닉에 빠졌다.
왠지 그 날 나는 무조건 죽음을 맞이할거란 확신에 빠졌다.
어떤 확신이든 통상적으로 근거가 있기 마련인대, 나의 근거는 내 느낌과 공포였다.
스스로 내쉬는 한숨까지도 되돌아와서 내 몸을 찌르고
순박하게 웃는 지인이 날 비웃고 조롱한다 느끼는대 이게 내가 죽을때가 된게 아니면 뭐였겠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그 날 잠들고 깨어난 나는 죽지않고 살아있었다.
허탈함과 무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치만 그와 동시에 기묘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토록 처절한 공포와 확신에 불구하고 나는 죽지 않은것이다.
아직도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잠든 순간 죽은 것과 다름없는 몸뚱이의 뇌속에선 무슨일이 벌어졌을까?
멀쩡히 눈을 뜬 나는 그날 하루 알수 없는 무적감에 휩싸여였다.
늘 힘들어하던 것들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손쉽게 해치웠다.
난 정신적인 죽음에서 부활했던 것이다.
이후 내 개인적인 변화가 가속도를 얻었다.
그 후로 나는 명상을 하곤 했다. 감정을 통제하고 삶을 관조하는 태도가 생겨났다. 따라서 쉽게 화내지 않고 쉽게 폭소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일에서 공포가 느껴지면 주먹을 꽉 쥐고 냉철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소득을 부단히 늘려서 독립했다.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해 독서를 한다.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개인적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다.
꽤 나쁘지 않은 만큼의 소득을 버는 방법은 배웠다.
따라서 당장 내일의 명줄을 연장하기 위한 공포는 거의 없다.
돈이 없어서 학자금대출을 땡겨 샀던 노스페이스 패딩을 버렸다.
그렇지만 이따금씩 알수 없는 정체감을 느낀다.
고작 이따위에서 만족할 것인가? 혹은 내가 만족 해버린 것인가?
그건 아니다. 지금의 소득은 생활에는 불편함이 없을지 몰라도 절대로 성공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
이런 소득에 대한 평가는 내가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고 속삭인다.
반복되는 지시와 업무수행, 숙달을 위한 기계적인 노력, 그 속에서 나는 개성과 방향을 잃었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게 아니다"
데카르트 명제에 대한 내 중학교 시절의 결론이다.
1차원적인 단순함이지만 확고한 메시지가 있다.
우리가 잠든 순간 표면에 중얼거림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죽은건가?
오컬티즘에서 말하듯 존재는 분해되어 어딘가 이세계로 차원이동을 하는가? 한마리 나비의 일생을 누리고 날갯짓이 그칠 때 다시 되돌아오는가?
상자 속 고양이처럼 누군가에게 관측될때까진 유야무야 중첩된 상태가 되는가?
어떤게 맞는지는 알수 없지만
생각이 그칠 때 우리는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상사의 지시를 받고 일을 위해 생각하다보면
타인이 원하는 내 이미지는 강해진다,
가난은 흐려지지만 개성은 약화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간다.
방향성을 잃은 와중에 소득만큼은 부족하진 않다.
그럼에도 원하는걸 말해보노라면
나는 삶을 통제하고 싶다.
지휘자처럼 때론 화려하게 어쩔땐 박자를 놓치더라도 태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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