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와 천둥이 몰아치는 날이면 당신을 무엇을 떠올리는가?
유난히 큰 번개가 내리친 직후에 찾아오는 정전
굉음을 내는 천둥에 놀라 울어제끼는 애완견
번쩍이는 클럽의 조명, 어렸을 적 언젠가의 감전위기
초등학교 때 코팅지를 비벼서 정전기로 띄웠던 머리
이 밖에도 여러가지가 연상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번개라는 글자를 보거나 번개가 치는 날이면 마음이 들뜬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시절의 짧은 일화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쉐어하우스 침실에 누워있던 어느날 밤.
유난히 번개가 계속해서 내리치고 배란다로 비가 들이치던 폭풍우치던 날이었다.
잠이 오질 않아서 배란다에 앉아 번쩍이는 밤 하늘을 바라보던 중, 문득 순수한 궁금증이 생겼다.
'저기 너머에선 번개가 치고있다. 번개는 나무나 바닥에 꽂히고 있을것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번개가 내 몸을 관통할까? 그러면 나도 영화에서 처럼 초능력자가 되는건가? 아니면 고통을 느낄새도 없이 다음 생으로의 환생이 진행될까?'
이런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 두뇌를 굴려봤자 번개를 향해 떠나는 것보다 느리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우산을 펼쳐들고 새벽 2시에 문밖으로 나갔다.

내가 살던 킬코이의 작은 마을은 불 켜진 집 한 곳도 없이 조용했다. 우르르 콰쾅 천둥번개 소리와 빗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었다.
어쩐지 조용한 무인도에 온것 같은 기분이었다.실제론 소란스러웠더라도.
그리고 번개가 계속해서 내리치는 방향으로 정처없이 걸었다. 걷다보니 버려진 듯 보이는 건설 중장비기계를 지나쳤다.
자세히 보니 운전석에 사람이 잠들어있는 것 같았지만 말도 잘 안 통하는데 괜히 다가갔다가 변을 당할까 거리두기를 하며 지나쳤다.
그리고 어떤 레이싱 트랙으로 쓰였던 것 같은 거친 들판같은 장소를 지났다.
무덤도 보였다. 공동묘지였는지 묘비가 새워져 있었는대 기묘하게도 날씨탓에 오히려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이쯤 걸어오니 번개는 가까이 가려하면 더 멀어지는 존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번개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전혀 좁아지지 않았다.
다만 이 때부터 어떤 깨달음과 고양감이 나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무덤가와 트랙, 건설장비, 텅빈 마을을 지나오면서 어릴 적의 기억도 떠올랐다.
지금은 누구였는지 모를 친구와 나는
'모험'을 하자! 하고 선언한 뒤에
잘 알지 못하는 동네를 실컷 뛰거나 걸으며
구경하는 놀이를 자주 했었다.
팔팔한 유년시절이라 두뇌의 귀소본능은 잘 작동했었다.
왠지 돌아오는 길은 기가 막히게 알았았다.
외국의 무덤이고 백인 귀신이 나와도 무섭겠는가? 싶기는 하다만
아는 사람 하나없는 외국의 낯선 무덤가를 지나치며 저주를 무서워하지 않고 파헤치는 도굴꾼처럼
무엇이든 이겨낼 것만 같은 무적감에 휩싸였다.
소름돋는 기분에 계속 관통당하면서 계속 번개를 따라가던 중
이런 기분이 한순간에 끝났다.
나는 걷다가 빛 한점 없는 장소에 도달했는대
그곳은 공사를 위해 마련된 부지로 보였다.
엄청나게 넓은 공간의 들판이
가로등 하나 사람손길 한점 닿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는대 입구는 가로막혀 있었다.
바로 우측엔 야생동물 주의 표지판이 보였다.
즉흥적이었지만 간절하게 번개를 찾고싶었고
불과 방금전까지 무적감과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꼈는대 그 소름이 서늘한 공포로 바뀌는게 전해졌다.
들판의 풀숲 사이 독뱀이 내 발목을 물거나 알수 없는 들짐승에게 붙잡혀 뜯어먹히는 이미지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나는 외국귀신은 무섭지 않았지만 실존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앞에선 한없이 무력했던 것이다.
번개가 치는 소리, 번개가 내리치는 번쩍임은 더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
그 자리에서 바로 뒤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이 때의 나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곤 용감한 몇걸음을 내딛어보고 헐벗은 무력감을 깨달은 하룻밤 사이의 변화를 되새겨본다.
그러다보면 오늘 혹은 어제, 저번주에 업무로 인해 받았던 스트레스나 즐거움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다가온다.
이 생생한 여행의 기억과 어릴적 모험담의 연계된 기억은 은연중 내 얼굴에 미소를 띄운다.
번개는 영적으로 진화와 영적상승을 뜻한다고 한다.
어쩌면 이때 내 영혼이 한단계 높은 곳으로 진화했던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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